오늘 오전(업무 시간 전)까지 납품해야 하는 걸 어제 좀 일찌감치 마치고 느긋하게 혼술하면서 드디어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긍지로 우뚝 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ㅎㅎㅎ

 

과연 명불허전이더군요. 작품성과 오락성을 겸비했다는 말이 실감, 통감, 공감됐습니다.

내친 김에 유튜브에 나오는 각종 인터뷰들(예전 거까지 포함)을 섭렵하다시피 하면서 봐 버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봉준호 감독이 '박력'이라는 말을 오용하는 사례를 세 군데서나 발견했습니다. 예컨대 송강호를 가리켜서 '박력 있는 배우'라고 하더군요. 그 외에도 '박력'을 쓰면 이상한 문맥에서도 쓰던데 그걸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느껴지더군요. 일본에서 쓰는 迫力을 그대로 따라 쓰는 거라는 걸요. 이에 관해서는 지금 쓰고 있는 책에서도 여러 가지 다양한 문맥 속에서 일본어 迫力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에 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미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도 한 번 다룬 적이 있죠. 일본어 '살벌'과 한국어 '살벌'에 관해 다뤘던 글에서 아래와 같이 말이죠.

かつては草木が[   11   ] 迫力があったんですが、今は殺伐極まりない風景ですね。

한때는 초목이 우거져서 [         12          ] 지금은[        13      ] 풍경이네요.

12 迫力があったんですが : 웅장한 모습이었는데

일본어 迫力도 한국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쓰이는 단어인데 의외로 이걸 그대로 ‘박력’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박력이라고 번역해선 안 될 문맥인데도 그대로 박력이라고 번역해 놓은 걸 감수했었습니다. 우리는 풍경 같은 것에 ‘박력’이라는 한자어를 쓰지 않습니다. 이 ‘박력’에 관해선 별도의 표제어로 자세히 다룰 생각인데, 다시 말해 그만큼 얘깃거리가 많아서 너무 길어지니까 일본어 迫力과 한국어 ‘박력’의 뜻을 사전에서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이 迫力은 문맥에 따라서 다양하게 의역할 수밖에 없는 대단히 까다로운 한자어입니다.

일본은 풍경이나 경치를 묘사할 때도 迫力을 쓰지만 우린 안 그렇잖아요? 풍경을 보고 '박력 있네요'라고 하지 않잖아요.

아무래도 영화감독이니 일본영화는 당연히 섭렵했을 테고 그러니 일본과의 교류도 많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일본어도 접하게 됐을 것 같은데(일본어를 모른다면 통역자가 잘못 통역해 줬을 수도...), 봉준호 감독은 한국어 '박력'과 일본어 迫力이 다르다는 걸 모르고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근데 이런 유명한, 따라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방송 같은 데 나와서 저렇게 표현해 버리면 아직 어휘력이 무르익지 않은 어린 사람들은 그대로 따라 쓰기 마련이죠. --;;; 한국어 '흑막'과 일본어 黒幕가 전혀 다른 뜻인지도 모르고 그걸 그대로 따라 씀으로써 널리널~리 퍼져 버렸듯이 말이죠.

그런데 이처럼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미 널리 퍼진 것들은 이것들 말고도 또 많습니다. 지금 퍼뜩 떠오른 게 '온도 차'라는 표현인데, 두 사람이나 두 주체 사이에 생각이나 의견의 차이가 있다는 걸 일본에선 '온도 차가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제가 아는 한 옛날에는 한국에서 '온도 차'를 이런 식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습니다.

영상번역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본방송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애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봤던 여러 오락 프로들 중에서 이 '온도 차'라는 표현을 처음 듣고 일본은 저런 식으로 비유적으로도 쓰는구나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게 거의 20년...은 안 됐고 17년쯤 됐겠네요. 아무튼 요즘에 보니까 방송에서도, 심지어 뉴스 같은 데서도 '온도 차'를 일본처럼 비유적으로 사용하더군요. 그런데 이 경우는 딱 들었을 때 '아, 그럴싸하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건 나라들이 교류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적절한 표현, 딱 와닿는 표현, 맛깔나는 표현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다른 단어(흑막과 박력처럼)를 무턱대고 따라 쓰는 건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연히 다른 뜻을 지닌 단어니까요. 심지어 어떤 예도 있냐 하면, 낚시 번역이 가끔 들어오기 때문에 용어 같은 걸 익히기 위해 틈이 나면 (취미도 아닌)낚시 방송을 보곤 하는데, 어떤 방송의 모 피디는 '문답무용'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여과없이 그대로 자막으로 내보내더군요. 그것도 출연진 중에 일본인이 있어서 일본인이 한 말을 그대로 직역(?=오역)한 게 아니라 피디 본인이 그 말을 자막으로 띄운 거였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문답무용'이라는 자막을 보면 뭔 말인지 알아들을까요? 그 피디는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국어를 오염시키는 짓을 많이 하더군요. 그중 하나가 바로 '텐션'이라는 말입니다. 이 역시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오용되고 있는 말인데, 심지어 이 テンション(텐션)이라는 일본어는 정확한 영어의 뜻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일본에서조차 오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엉터리 일제 영어 표현이란 거죠. 다른 사전에서도 이 오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일단 goo 사전의 풀이를 보시죠.

テンション【tension】

の解説

精神的な緊張。また、不安。「テンションが高まる」

(1の誤用から)俗に、気分や気持ちのこと。「朗報にテンションが上がる」「いつもテンションの低い人」

張り。張力。伸長力。「ロープにテンションをかける」

즉, 일본에서 말하는 '텐션이 오르다, 내리다', '하이 텐션' 같은 표현은 애초에 영어 단어의 뜻을 잘못 이해해서 오용하게 된 것이 널리 퍼져서 정착하게 된 거란 말이죠. 근데 그 피디는 이 '텐션'이라는 일본에서 오용된 영어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더군요. 아마도 일본에서 공부를 했었거나, 아니면 일본덕후 출신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제 추측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아예 남용, 남발, 난무 수준으로 자막으로 마구마구, 버릇처럼 뿌려대고 있던데, 우리는 주격 조사 '은/는'을 맥락 없이 문장의 맨앞에 두지는 않죠. 무슨 말이냐 하면...

는 이러고 있음

은 아닌 거 같음

는 물 건너 갔음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일본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이미 정착이 됐지만 한국에선 그렇지 않잖아요. 그냥 글 속에서 뒤에 공간이 없어서 줄을 나눠야 할 때 자연스레 '는/은'이 아랫줄 맨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경우는 있지만,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했다. 하지만 그 사람

은 그것에 대해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맥락 없이 저런 자막을 달랑 붙이진 않죠. 더구나 영상번역에서는 저런 식으로 처리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

근데 그 피디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어이없는 자막을 남발해 대는 걸까요?

혹시 자신이 일본덕후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일까요?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밖에 없는 TV 방송국 피디쯤 되면, 더욱이 그 프로 시청율이 꽤 높은 모양이던데, 자신이 오용해 버린 말이나 표현이 일반인들에게 끼칠 폐해 정도는 생각하면서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드디어 봤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리고 인터뷰에서 봤던 '박력'의 오용에 대해 말하려다 너무 많이 옆길?로 샜네요.

봉준호 감독님, 그리고 기생충, 그리고 출연한 배우 여러분 및 스태프 여러분.

여러분 덕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참 오랜만에' 자랑스러워지는 나날들입니다.

파이팅입니다!!!

혹시 저처럼 너무 바빠서, 또는 다른 이유로 아직도 못 본 분이 있다면 꼭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전 이제 점심 먹고 또 열일 모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