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다 1

 

예전에 아래 글을 쓰면서 책도 마무리되고 하면 짬을 내서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다'는 타이틀로 글을 한번 써 보겠다고 했었죠.

https://blog.naver.com/iveen/221848486013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다'라는 제목으로...

직역 안 했다고 뭐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언젠가 위의 제목으로 글을 한번 써 버려고 생각한 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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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어젯밤에 어떤 분이 댓글로 의역하는 건 '거지같다'면서, 그들의 말하는 방식인데 왜 굳이 우리한테 끼워 맞추냐고 하시더군요. 어제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짧게 댓글 쓰고 말았는데 겸사겸사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다'를 타이틀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우선, 아래 글을 일본어 전혀 모르는 한국 사람이 읽는다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까요? 아니, 무슨 말을 하려는가 파악하기 이전에 이게 '한국어'로서 매끄러운가요? 어법에 맞나요? 완전한 비문 아닌가요?

A : 드디어 찾았구나. 여기서 만난 게 백 년째다! 이번엔 절대 못 달아나.

B : 달아날 것인가! 상등이다! 받아서 서겠다.

A : 그렇게 오지 않으면! 오늘은 기필코 결착을 붙이자.

B : 웃게 하는군. 너 따위는 내 상대가 되기에는 100년 빨라! 너야말로 죽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달아나 버리면?

A : ‘달아나 버리면’이라고? 소지천만!

B : 소지천만? 말하네.

 

일본어 고수분들은 위 글의 원문을 대충 짐작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아래의 글을 '직역!!!'한 겁니다. 직역했으니 훌륭한 번역인가요?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니 그대로 직역을 해야 하고, 의역은 거지 같은가요?

A:やっと見つけたぞ。ここで会ったが100年目だ!こんどは絶対に逃げられんぞ。

B:逃げるもんか!上等だ。受けて立つ!

A:そう来なくちゃ。今日は必ず決着をつけようぜ。

B:笑わせるね。てめえなんかは俺の相手になるには100年早い。てめえこそ殺されたくなけりゃ逃げちゃえば?

A:逃げちゃえばって?笑止千万!

B:笑止千万? 言うね。

 

한자어 번역도 고역이라시며 왜 굳이 그걸 한국식으로 바꾸냐고 답답함을 토로하시더군요. 정작 답답한 사람은 저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한국 사람한테 '상등이다'라고 하면 알아들을까요?

'정말 소지천만이네'라고 하면 알아들을까요?

저들의 말하는 방식이니 우리 한국사람들이 저런 한자어를 외워야 하는 건가요? 그래야 정상인 건가요? 맨 마지막의 「言うね」는 상대가 입밖에 꺼내기 힘든 말이나 표현을 과감하게 했다거나, 또는 아주 재치 있는 말을 했다거나 했을 때 관용적으로, 정형화돼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직역을 해야 하니 "말하네!"라고 번역해야 하나요?

그리고 또 「知るか!」라는 표현이 있죠. 이건 '내가 아냐?' 또는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일본의 정형화된 표현입니다. 직역을 해야 옳은 거니까 '알까!'라고 번역하면 칭찬해 주실는지요?

오늘 축구 있는 날이니 급히 이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느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다 2(기자들이 또 사고 쳤군요)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다 2를 써야 하는데 바빠서 짬이 안 나고 있는데 기자들이 또 사고를 친 기사를 발견하고 서둘러 끄적여 봅니다. '당돌(唐突)'이라는 한자어도 일본어를 어설프게 아는 기자들이 잘못 해석(직역?)해서 웃픈 헤프닝이 있었다는 글을 제 책에서도 썼습니다. 또한 한국어 '대화'와 일본어 '대화'의 뜻과 쓰임새 차이에 관해 설명하는 글에서도 살짝 언급한 적이 있죠. 아래와 같이 말이죠.

어떠신가요?

그러니까 그 일본 기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대화'라는 한국 한자어가 일본 한자어 対話를 말하는 것인 줄 알고, 문 대통령은 바이든과 김정은의 対話, 그러니까 1대1로 나누는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착각한 것이죠. 하지만 문 대통령이 말한 '대화'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정상회담을 통한 대화도 포함되는 포괄적 개념이죠. 따라서 바이든의 견해와 문 대통령의 주장이 '온도 차'가 있다고 느낄 만한 문제가 아닌데 저 일본인 기자는 기사를 그런 식으로 쓴 것이죠. 단어에 대한 오해가 오보를 낳고 마는... 唐突(당돌)이란 일본 한자어에 대한 한국 기자들의 오해가 '김연아더러 당돌하다고 했다'며 엄청난 파장을 낳아서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쿠야시이'라는 말에 대한 한국 기자와 한국인들의 오해가 아사다 마오만 죽일 *으로 만들었던 사건도 있었듯이...

 

그런데 이번에는 색기(色気:いろけ)라는 말에 대해서 어설프게 안 기자들이 또 아래와 같이 사고를 쳤군요. 네티즌들 또 난리난리 났고요. --;;

 

 

 

한국 기자들의 이 오보에 대해 바로잡는 기사를 쓴 신문사는 맨 위의 오마이뉴스 기사뿐이네요. 관심 있으신 본들은 읽어 보세요.

 

김연아에 “색기 넘친다” 일본 언론 보도 팩트는 - 미디어오늘 조준혁 기자 (mediatoday.co.kr)

일본어 '색기(이로케)' 역시 말뜻의 스펙트럼이 꽤 넓은 단어입니다. 아레 코지엔 사전의 뜻풀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죠.

いろ‐け【色気】

①色のぐあい。いろあい。「ネクタイの―がよくない」

②愛敬あいきょう。おもむき。風情。「座に―を添える」

③異性の気をひく性的魅力。「おてんばで、―も何もない」

④女っ気。「―抜きの会」

⑤異性に対する関心・欲求。性的感情。「年ごろになって―が出てきた」

⑥あるものに対する関心・欲求。「大臣の椅子に―を示す」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도 다양한 전문가들이 설명하고 있듯이 일본에서 色気를 여성에 관해 쓸 때는 한국과 달리 섹시한 매력, 남성을 사로잡는 요염한 매력 등의 '긍정적' 뜻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색기'라고 직역해야 옳은 걸까요?

덕분에 2편 거저 먹게 됐는데(^^;;), 다시 강조하지만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습니다!!'.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다 3

 

사실 이 주제로 3편은 추석 연휴 때 작성해 올릴 생각이었는데, '앙대 앙대 코패니즈 한자어' 예약 주문 이벤트로 공유를 약속했던 '유의어 및 연상어 정리' 파일을 연휴 내내 보강하느라(머리 쥐 내리는 줄 알아뜸 --;;) 밀렸고. 연휴 끝나자 한꺼번에 몰려 온 일들을 처리하느라 결국 오늘에야 쓰게 되네요.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리가 영어를 배우게 될 때 처음으로 접하는 생경한 용어가 있죠? 바로 숙어(熟語)라는 용어 말입니다. 이 숙어란 뭔가요? 두 개 이상의 단어가 모여서 각각의 단어의 뜻만으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 독립된 의미를 형성하는 말을 뜻하죠.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각각의 단어가 지닌 뜻만으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통하게끔 새로이 뜻풀이를 한 것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의역'이란 말이죠? 그리고 영어에는 이 숙어가 굉장히 많죠. 이 숙어를 따로 공부하지 않고는 영어라는 언어를 이해할 수가 없죠. 영어 공부할 때 숙어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기억들 다들 계시죠?

그리고 영어는 숙어가 아니더라도 사전 속 한 단어의 뜻풀이가 굉장히 많은 것들이 수두룩하죠. 그리고 예문들도 엄청 많이 제시해 놓은 것들이 많고요. 예를 들어 drop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를 한번 검색해 보세요. 옥스퍼드 사전의 경우 동사로서의 뜻풀이는 무려 13개, 명사로서의 뜻풀이는 7개나 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예문들도 풍성?하게 제시하고 있고요. 이게 뜻하는 바가 뭘까요? drop이라는 말이 지닌 '기본적인 뜻'만으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뜻풀이를 제공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의역'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직역과 의역의 정의에 대해서 짚어 보고 갑시다. 사전을 찾아보면 직역은 '외국어로 된 말이나 글을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함. 또는 그런 번역'라고 나와 있고, 의역은 '원문의 단어나 구절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살리어 번역함. 또는 그런 번역'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역이란 건 넓게 해석하면 사전에서 제시한 뜻풀이에 충실해서 번역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렇다면 사전에 제시돼 있지 않은 뉘앙스로 쓰이는 것만 의역이 되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 한국에서도 힙합이 선풍을 일으킨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표현으로 'Drop the beat'이라는 표현이 있죠(물론 힙합에서만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이건 사전에 뜻풀이가 돼 있지 않습니다. 그럼 직역을 해야 하니 사전 속 뜻풀이 중에서 골라서 '비트(리듬) 떨어뜨려'라고 해야 올바른 번역이 되는 것인가요?

그리고 MMA를 즐겨 보시는 분들은 UFC의 유명한 심판 존 맥카시가 퍼뜨린(?) 'Let's get it on'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시합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존 맥카시가 늘 쓰는 말이죠. Get it on?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근데 다행히 이건 숙어로서 사전에 실려 있네요. 2번 뜻풀이에 (구어로)시작한다는 뜻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걸 직역이라 할 수 있을까요? '시작하다'라는 뜻풀이 자체가 의역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숙어는 곧 의역인 것입니다.

이렇듯 외국어라는 건 직역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어는 전에도 언급했듯이 언어 구조나 문법 체계가 한국어와 닮았고, 또한 어순도 거의 비슷하고 같은 한자문화권이기에 직역을 해도 통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일 뿐, 의역하지 않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거나, 매끄러운 표현이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입니다.

1편에서 말했던 「言うね」를 '말하네'라고 번역하면 제대로 된 뜻 전달이 안 되듯이, 또한 「知るか!」를 '아는가!' 또는 '알 것인가!'로 번역하면 이 말이 지닌 뜻이 온전히 전달이 되지 않듯이 말이죠.

제가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을 때 어떤 교재에서(우스갯소리로 한 말인지, 아니면 실제 실화를 말한 것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일본 세관원에게 한국 사람이 좀 잘 봐달라는 의미로 「よく見てください」라고 했다는 걸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일본 세관원이 이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밀수한 게 있는지 '잘(자세히) 봐 달라'는 말인가 싶겠죠? 즉, 이 경우에는 「大目に見てください」라고 의역을 해야 본래의 뜻이 전달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뒤통수를 치다'라는 표현을 배신당하다는 뜻으로 쓰는데 이걸 그대로 「後頭部を叩く(打つ)」라고 번역하면 일본인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까요? 저번 시간에도 일본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고 이상한 한국어가 되는 예시를 들었지만, 이런 것들을 일일이 예를 들자면 1년 365일이 걸려도 모자랄 겁니다.

저는 외국어의 번역을 직역과 의역으로 구분할 게 아니라, 정역과 오역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직역이라는 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까지 생각할 정도입니다. 왜? 외국어의 번역은 기본적으로 '의미가 통하게끔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의역'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번역가들에게 직역 안 했다고 뭐라고들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의 주장처럼 직역을 하면 아래와 같은 희한한 한국어가 되고 마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다는 겁니다. 과연 아래의 글이 매끄럽고 유려한... 아니, 이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딱 읽어서 단번에 이해가 가능한 한국어 문장인가요?

 

그것은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폭발적이고 즉각적인 발병이 있었고, 다른 나라로 감염을 퍼뜨린 클러스터(집단 감염지)를 갖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다시 한번 결론을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외국어 번역은 직역일 수가 없습니다!

<앙대 앙~대 코패니즈 한자어> 출간